기억

습작 2018. 5. 12. 17:33


내가 처음 사랑한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그 전엔 내가 여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친구의 맑은 눈을 보거나, 흰 블라우스를 입은 뒷모습을 볼 때도 그냥 아, 아름답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사랑한다고 여긴 적은 없었거든요.

여태껏 아무도 챙겨주지 않던 생일이었는데, ㄱ이 음력으로 오늘이 227일 이더라, 하면서 작은 로션을 내밀었을때에도. 소풍 가던 날 나에게 살짝 기댈때에도.

한번도. 그 애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열 다섯살이었고 학교가 끝나면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재잘대곤 했으니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다정다감한 가부장과 친절한 언니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 애의 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아아. 아부지는 술마시고 두들겨 패는 이외의 역할도 하는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저 드러나 보이는 결과만을 보고, 원인은 깡그리 무시해 버리죠.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한 겹 깊은 곳에 숨어있어요.

언젠가 ㄴ씨가 강간 당한 후 남장을 하고 찾아온 후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 후배를 껴안고 울었다는. 긴 머리에 이쁘장한 얼굴. 참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는데 그 날은 짧은 머리에 와이셔츠, 넥타이까지 메고 와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동생을 붙잡고 울기까지 했으면서.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걸까요.

혹시, 그 사람을 붙들고 하느님이 말한 것에 거슬려 사는게 불쌍해서, 지옥불에 떨어질까봐 운 걸까요...

 

나에게는 무덤 속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걸 말하는 건 당신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겠죠. 그냥, 부담없이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이상한 이야기라면 그저 잡지책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시면 되잖아요.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우리는 다섯 식구였어요. 할머니, 아버지, 엄마, , 남동생. 아직도 이 서열이 입에 붙어있습니다. 엄마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고, 엄마는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이고,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높은 사람이 말한 것에 대해 낮은 사람은 절대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규칙은 남동생과 나 사이에서는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 따라야 하는 건 저였습니다. 저를 챙기는 건 아무도 없었지만, 남동생의 뒤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거든요. 우리는 싸우다가 곧잘 할머니에게 갔습니다. 할머니가 누구보다 공정하게 이 사태를 해결해 주시리라, 믿으면서요. 왜냐면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고 아버지보다도 높은 사람이니깐요.

하지만 할머니는 늘 동생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 일에서도요. 그렇지만 저는 그 판결에 복종하는 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집안의 어른이고 제일 높은 사람이니깐요. 혀를 낼름거리며 의기양양하게 뛰어가는 동생이 보기 싫었지만 높은 사람은 옳은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했으니깐요.

 

여섯살?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던 다섯 살?

저는 무거운 것이 제 몸을 누르는 느낌에 잠이 깼습니다.

가위가 눌린거냐구요? 아뇨. 처음 가위에 눌린 건 그보다 한참 지난 열 한 살때였어요.

눈을 뜨자 아버지가 날 누르고 있더군요.

낄낄 웃으면서.

난 숨이 막혀 왔습니다. 난 겨우 대여섯살난 깡마른 여자 아이였을 뿐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방 옆에 있었지만 텔레비전에서 하는 연속극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나 봐요. 아니,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로 봐서, 아부지가 날 깔고 엎드려 있다는 걸 알긴 알았나 봅니다.

조금 축축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숨막히는 무게, 숨소리와 담배에 쩔은 입냄새. 무거웠다는 거, 그래서 숨쉬기 힘들었다는 게 제일 많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내 위에서 내려오자, 나는 내 옆에 있던 빗자루를 집어 던졌습니다.

숨 막혀 죽을 뻔 했잖아. !

그냥 웃고 가버리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무거움만 생각날 뿐.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것도 교육 공무원.

오랫동안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가끔씩 아버지의 제자들이 집에 놀러오기도 했습니다. 어른이 된 제자가 정종병을 들고 인사를 올 때도 있었습니다. 나도 그 사이 점점 나이가 들어 버려서 아버지의 제자들이 더 이상 언니가 아니고 동갑내기였다가, 이젠 내가 나이가 한참 많게 되어 버렸네요.

학교에서의 그는 꽤나 좋은 선생님인 모양이었습니다. 친구들, 동료들이 찾아와 껄껄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다 가곤 했습니다. 제자라며 오렌지 주스 한 통을 두고 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존경요? 글쎼요.. 난 잘 모르겠습니다.

성당 뒷마당에서 나를 목마 태우고 다니거나, 춥다고 웃저고리를 벗어 덮어 주던 다정한 아버지의 기억도 있지만,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니까요.

 

중학교때의 어느 날인가, 학교에 다녀온 저는 들떠 있었습니다.

원래는 봄에 가기로 했었던 극기훈련을 떠나기 전날이었습니다. 짐을 싸느라 분주했어요. 세면도구와 반 친구들이 잠들었을 때 낙서할 펜, 같이 먹을 과자 몇 개.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는 내게 묻더군요. 지금 뭐 하는 거냐고.

, 내일 극기훈련을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더니 회비를 얼마를 냈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어요.

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매년 봄에 가던 극기훈련이 갑작스런 비로 가을로 연기 된 거였으니까요. 봄에 얼마를 냈었는지, 기억 해 내지 못했습니다. 이만 사천원이던가, 삼만 오천원이던가.

지금 같으면 아무렇게나 대답을 했겠지만 그 때의 저는 어렸습니다.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얼마 냈냐고 재차 물었지만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정확한 비용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원래 봄에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가을로 연기 된 거라서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

갑자기 눈에서 불똥이 튀었습니다.

. 아버지가 저를 때린 거였죠.

왜 기억을 못해, ? 돈 내줬는데. 이런 썅!

막으려던 내 손을 억센 손으로 잡고서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저를 때렸습니다.

안경이 저만치 날아가고, 머리가 헝클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입 안이 찢어지고, 볼이 부어올랐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뭔가 둔탁한 것이 제 머리를 때렸고 노란 색을 보고서 그게 제 방의 의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어요. 그 날 이후 제 오른쪽 옆, 그러니까 귀 바로 윗쪽 머리뼈는 움푹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머리가 둔한지도 몰라요.

그렇게 저를 때리다가 지쳤는지, 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때까지 잠에서 깬 할머니와 엄마, 동생은 마루 한 켠에 앉아서 그냥 저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관객이 무대 아래서 배우의 연기에 몰입하듯이.

그런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운이 나쁘게도 악역을 맡아야 했던 건지도.

매질이 멈추자 할머니는 저에게 욕을 하며 아버지에게 빌라고 말했습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구요. 하지만 제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른한테 무조건 빌라고 하는 말. 저는 나중에 아이들한테 하지 않을 겁니다. 잘잘못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힘있는 사람이 옳다고 하는거, 그게 진실입니까? 그건 단지 권력에 의해서 아닌 걸 맞다고 잠시 우기는 것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남자들은 그런 힘에 아주 익숙해 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중학교 여름방학 ...

엄마도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잘못했다고 무조건 빌라고 똑같이 말을 했을 뿐이죠.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예전처럼, 너하고 나하고 나가서 죽자. 하며 날 때리지는 않았으니까요.

. 그래서 동생이랑 같이 있는걸 싫어합니다. 제법 머리가 컸다고 술을 사달라, 밥을 사달라 놀러가자 하지만 저는 걔가 저를 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어릴 때부터 줄곧 보아 온 게 있는데.

할머니한테 가서 이르면 무슨 일이든 제가 잘못한 일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같은 반 친구 인자처럼, 동생한테 이름 불리고, 무시 당하면서 기죽어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더 높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왜 나이가 많으면 더 높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걸 저한테는 적용하지 않은 걸까요.

그래서 저는 동생이 괜히 시비를 걸거나, 할머니가 밥을 줄 때 똑같이 준다고 하면서 차별이 있으면 대들고, 때렸습니다.

저에게 욕을 할 때도요. 아랫사람은 높은 사람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친 건 할머니였습니다. 그 말에 따르면 잘못을 저지른 동생을 저는 얼마든지 야단치고 때려서 가르쳐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아 올 무렵, 저는 배낭을 싸들고 나왔습니다.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습니다. 새벽이라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양복을 차려 입은 아저씨, 바쁘게 구두 소리를 내며 출근하는 아가씨들. 시장은 아직 다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어요. 배낭을 메고 이리 저리 걸어다니는 아이는 저 뿐이었습니다.

아직 모이기로 한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았습니다.

도서관에서 나와 집까지 걷던 길을 되짚어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직 캄캄해서 전등불이 켜져 있는 게 꼭 그 시간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골목을 지나서, 독서실까지 가는 데 천천히 걸었는데도 이십 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독서관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고시 공부를 하는 총무가 집에 가는 날이었는지 차고의 셔터 문도 내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유소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서.

친구 집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다리 옆으로 주욱 내려가다가 다른 다리가 하나 더 나오기 전 개천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그 집이 바로 영순이네 집이었습니다.

안에서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어요. 영순이 아버지의 트럭이 바깥에 있는 걸로 보아 아침 식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유, 왜 또 그걸 입었어? 내가 다려서 옷걸이에 걸어 놨잖아!

낯익은 영순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영순이는 아직 자고 있는지 방에 불이 꺼져 있었어요. 창문을 두들겨 볼까 하다가 방해가 될까 싶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나는 거리를 헤메고 다녔습니다. 다리가 아파 올 무렵에야 학교에 갔습니다.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교실은 조용했습니다. 책이나 읽을까 했더니 문이 열리고 미희가 들어왔습니다.

? 53. 너 이시간에 왠일이야?

. 좀 일찍 나왔어.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들어왔습니다. 모두 밝은 얼굴이었죠. 공식적인 외박.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할만큼 물들지 않은 순진한 얼굴들. 그저, 모여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때니까요.


   20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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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빠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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