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인형에 얽힌 아픈 추억이 생각났다. , 뜬금없다. 아주 오래전이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욕구에 충실하겠다고 심리적인 표면에 떠오르는 걸 무심하게 바라보겠다고 한 이후로 가끔 이런다. 정확히 말하면 잊었던 게 아니라 내가 잊기를 바라면서 누르고 있었던 거겠지. 깊은 곳에서부터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네살, 혹은 다섯살의 나. 시내에서 엄마와 외할머니를 만나 백화점에 간다. 나는 들떠있다. 할머니나 남동생도 없고 이런 곳에 가는 것도 처음이다. 한손으로는 엄마를, 한손으로는 외할머니를 잡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닌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인형 매장에서 갈색의 커다란 곰인형을 산다. 나는 신이 나서 그 곰인형을 안고 다닌다. 갈색의, 입 부분은 살색이고 두 눈이 또록또록한 인형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두 사람은 그 인형을 남동생에게 준다. 그 인형은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한번도 내 인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내가 갖고 싶은 인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동물 인형이나 집짓기 블럭 같은 걸 좋아하던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당시 유행하던 마루인형을 선물한 적은 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인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마루인형은, 금발머리에 파란 눈에 여성성이 극대화된(?) 모습이기도 했다. 이상하게 보이는 발육된 가슴과 엉덩이. 완벽하게 성인의 모습을 한 몸매. 지나치게 흰 피부.

당시로는 꽤 비쌌을, 집과 인형용 신발, , 거울까지 다 들어있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실망했었다. 나는 마루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인형은 곧, 멋부리고 꾸미기 좋아하는, 마루인형을 꾸며주며 노는 것을 좋아할 사촌동생에게로 갔다. 내가 여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은, 혹시 그런 선물을 하면 내가 여성스러워지지 않을까( 인형을 가지고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모양을 바꾸며 놀고 나아가서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바보같은 선택이었다.

여자애들은 어렸을 때도 '엄마'로써의 역할놀이를 강요받는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도 한 팔에 젖병이 들려 있어서 입에 끼울 수 있는 어린 아기 인형이 있었지만(눈이 파랗고 피부가 너무 하얘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곧 싫증을 느꼈다. 소꿉장난, 지나치게 여성성만을 강조한 팔등신 서구 미인형의 사람인형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동물인형이고 집짓기 블럭이었다. 큰언니가 들고 춤을 추는 듯이 흔들면서 노래를 불러주던 갈색의 원숭이 인형. 귀퉁이의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삼각형, 사각형, 원기둥 모양의 블럭. 그리고, 마당에서 어슬렁 거리던 누렁이라는 이름의 큰 개.

조금 더 커서는 코코블럭을 갖고 노는 것이 좋았다. 아직 레고가 나오기 전, 그 블럭으로 차를 만들고 집을 만들고 망원경을 만들며 놀았다. 총도 좋아했다. 국민학교 1학년때는 앵글, 스패너 같은 단어를 외우느라 고생하면서 과학상자를 조립했다. 너트와 볼트, 나사.. 그때부터 익숙했던 것이다. 공구의 이름과 공구의 사용법에. 나는 1호쯤 되는 커다란 세트가 갖고 싶었다. 비행기도 만들고, 달 착륙선도 만들 수 있는. 나에게 주어진 건 책 안에 열 몇가지의 만들 수 있는 것들의 예가 나와있는 5호였지만. 그 안에 있는 물체의 순서를 따라서 만들기도, 모양이 비슷한 것 여러 가지를 모아서 로보트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같이 놀자고 하며 과학상자를 꺼내니까, 얼굴을 찌푸렸던 것이 떠오른다. 그건 남자들이나 하는 거야.. 이런 말을 했었던 듯. 하지만 우리집에 마론 인형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놀이에 있어서, 여성적인 것, 여성성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남동생과 다르게 하는 것. 나를 차별받게 하는 그것.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나는 동생과 평등한 취급을 받기 위해서 무지 애를 썼다. 그래서 여성적인 것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꾸 떠올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국민학교때는 프라모델 조립에, 조금 더 커서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아카데미사에서 나온 라디오 조립 세트나 과학상자의 전자 버전인 전자상자(?)를 조립하는 것을 즐겼다.

초인종, 기우 경보기. 트랜지스터, 저항. 한 손에는 납을, 한손에는 인두를 들고 납땜에 이상적인 4초 안에 땜을 마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곤 했었다. 기판을 달군다, 1. 납을 댄다,1. 납을 뗀다,1. 인두를 뗀다 1. 납을 지나치게 쓰지 않고 딱, 알맞게 퍼진 원형의 회로판을 보는 게 좋았다. 내가 만든 것에서 소리가 나고 불이 들어오는 것도.

 

지금도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 뜨게질이나 바느질 보다는(수놓는 것이나) 망치나 톱, 칼을 들고 하는 공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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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빠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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