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습작 2018. 5. 12. 19:40


늦은 오후.

박물관에 가기는 늦은 시간이었다.

해 지는 걸 보고 싶어서 인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중고등학교때 답답하다 싶으면 바다에 갔던 것 처럼 서른이 된 지금도 나는 바닷바람을 쐬러 간다.

배가 고파져서 동인천역에서 내려 지하상가를 거쳐 신포시장에 갔다. 거의 한 정거장쯤 되는 긴 지하상가. 화려하다. 가지가지의 상품들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상인들로 활기가 넘친다.

자주 가곤 하던 할머니집에 찾아갔다. 스티로폼 통에 키우던 화초가 안으로 들여놓아져 있고, 문에는 전기요금 1600원 이라는 고지서가 꽃혀 있었다. 할머니네는 문을 닫은 걸까. 아니면 일찍 닫고 어딜 가신 걸까. 언젠가부터 할머니 대신 할머니의 딸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괜히 걱정이 되었다. 건강이 안 좋으신가. 이 칼국수를 먹고 싶어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옆에 돼지네가 열었길래 들어갔다. 아줌마는 혼자 무료하게 티브이 오락프로를 보고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티브이에서는 연예인들끼리 놀고 있었다. 저게 왜 오락 프로일까. 자기네들이 노는 거지, 우리가 노는 게 아닌데. 열심히 요가 동작을 따라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 웃고 있었다. 아니, 아주머니도 웃었으니 오락 프로가 맞는 걸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이 땅을 떠나 있었던 걸까. 오락프로라 불리는 것들을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칼국수를 시켰다. 칼국수에 튀김가루가 안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무도 하나 추가. 양이 좀 많긴 하지만 오랜만에 우무도 먹고 싶었다.

단무지와 깍두기, 우무가 먼저 나왔다. 우묵. 혹은 우무. 잘게 썬 우무와 채썬 양배추 위에 초고추장이 올려져 있다. 매웠다. 그래도 옛날 맛이 난다. 이 집 우무는 다른 집에 비해 찰지다.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을 만큼.

튀김가루 넣어 드릴까요? . 많이 넣어 주세요. 다행히 튀김가루가 있었다.

칼국수가 나왔다. 아무래도 양이 좀 많은 것 같다. 아주머니가 내 덩치를 보고 많이 주신건가. 계란 하나를 풀고 튀김가루와 김 쪼가리를 올린 칼국수는 변함이 없다. 우무와 칼국수를 번갈아 가며 먹었다. 혼자 오는게 처음이던가, 아니던가.

아마도 고등학교 이후 나와 함께 인천 구경을 온 사람이라면 이 집에 아니 이 골목에 한번씩은 다 와봤으리라. 난 밀가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할머니집 칼국수만은 예외다. 이 집도 맛이 괜찮다. 면발이 좀 가느다란 것만 다르다.

면발을 남겨야겠군, 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닥이 보이도록 국물까지 다 먹어버렸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이십대 청년 둘이 나타난다. . 어서들 와.

이모, 우리 제육 하나 칼국수 하나. 어제는 왜 그렇게 일찍 닫았어? 우리 이제 낮에 와. 사장님이 시간 바꿔 버렸어. 일찍 닫지 마 이모.

열심히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짙은 색 옷을 입은 목소리 굵은 아저씨가 나타나서 온풍기 옆에 앉아 티브이를 열심히 본다. 조금 후 분홍색 스웨터에 야구모자를 쓴 아가씨가 나타났다. 엄마. 나랑 같이 가야 돼. 엄마가 싸게 하는데 안댔잖아. 금은방, 나 이 목걸이 반지로 할래.

내가 칼국수와 우무를 먹는 동안에도 티브이에서는 연예인들이 나와 이상한 체조를 하거나 누워서 복근 운동을 하며 낄낄거렸다. 놀고 돈벌고. 참 좋은 직업이군.

계산을 하고 골목으로 나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큰 길로 나가려는데 내가 가려하는 쪽에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삼색 얼룩 고양이 한마리가 엎드려 있다. 바닥이 찰 텐데. 가로등 온기라도 쬐고 싶은 건가.

결국 내가 빙 돌아서 가는 편을 택했다.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는 거라면 그것을 방해할 권리는 내게 없다.

신포동 앞에서 버스를 탔다. 306번을 타면 을왕리 해수욕장까지 간다. 참 많이도 변했다. 예전 같았으면 연안부두에 나가 관광 5호나 8호를 타고 두 시간쯤 가서 용유에 내려 버스를 타고 삼십분쯤 들어가야 도착하는 곳이었는데.

인천역을 지나고 월미도에 내렸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은 한 켠의 놀이동산에 몰려 있다. 작은 바이킹과 디스코만 작동중이다.

디스코 앞에는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 발을 동동 구르면서 구경하고 있다. 여전히 입담 좋은 디제이는 손님들 중 어리고 이쁜 여자들을 골라서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치마 입은 애들만 골라서 튕긴다. 열 일곱. 열 여덟. 녹색 셔츠를 입은 고교생은 슈렉으로 불린다. . 슈렉 옆에 까만 잠바. 너 몇살이야? ? 열 여덟? ,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밥 좀 굶어야겠다. 거기 머리 큰 세 사람. 완전히 소방차네. 가운데 까만잠바가 정원관. 내 소원이 뭔지 알지? 나보다 머리 큰 여자 만나는 거.

저 새끼가! 누군데 밥을 굶어라 마라야. 확 신경이 쓰였는데, 머리를 파마하고 치마를 입은 한껏 멋을 부린 고등학생들은 낄낄대며 서로를 때린다. 재미있는 건가. 저런 식의 말투? 남자한테 야. 너 살쪘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밥좀 끊어야겠다. 하면 재미있을라나. 저 디제이. 입이 걸다. 아니, 입이 건 걸 넘어서 좀 이상하다. 가운데에 서서 안전요원 구실과 재주넘기를 하는 스무살짜리 애를 가지고 논다. 나이는 열 살 차이지만, 그게 다는 아닐텐데.

디스코 바라보다가 시간이 다 가버렸다. 버스타고 월미도에 내렸을 때도 컴컴해지는 중이었지만. 터덜터덜 걸어서 바닷가로 간다. 용주호가 들어오고 있다. 옆에 코스모스 유람선도 지나간다. 배를 탈까. 영종도로 건너가 어시장 둘러보고 버스로 을왕리까지 갔다 올까.

혼자서 다저녁에 거기까지 가서는 또 뭘 하랴. 바닷가를 휘적휘적 걷다가 다시 버스타고 돌아올텐데. 혼자 횟집가서 조개구이에 한잔 할 수도 없고. 다니던 학교에나 한번 올라가 볼까. 이제 거기도 학교가 아니라 민박집이라 들어가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한동안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애들, 동네 동생들 이젠 알아볼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애기 엄마가 장래 희망이라고 말하며 씨익 웃곤 했던 **민박 언니는 지금 희망을 이뤘을까. 내가 무척 아꼈던 희선이. 얼핏 소피마르소를 닮은 외모에 순한 성격의 지연이. 유영이는 중학교 때인가 중학교 졸업 때인가 결혼을 해서 인천에서 단란주점을 한다고 들었다. 짬망태라 불리던 민경이는 잔뜩 배 불러서 왕산리로 내려와 있다고. 내 라이벌이었던 정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었다. 명애는 교대에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어느정도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3을 지나면서 다들 연락이 끊겼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19년 전의 모습들이다. 중학생이 되어서 찾아갔을 때 만났던 애들도 있지만 못 만난 애들도 있고,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애들도 있을테니. 이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듯. 그만큼 시간이 지났고 또 우리의 모습도 변했을테니까.

그러므로, 밝은 대낮에 한번 다시 가기로 한다. 예전처럼, 주머니 칼 들고 가서 굴이라도 따 보던지. 돌 들춰 작은 게를 잡아 같이 간 일행을 놀래켜 주던지.

조개구이가 유명하다고 하던데. 해 지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해 지는 걸 보기 위해서 우리가 전대통령 아들의 건물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그 건물에 들어선 카페에 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87년 당시 그 건물은 비어 있었고, 하얀 대리석 외벽에 형광분홍 지붕으로 된 성처럼 생긴 곳이었다.

이런 데서 살면 좋겠다. 그치?

보리수 열매를 따러 올라간 우리는 그 건물이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 처럼 생겼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곤 했다.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 처럼, 바닷가의 저쪽 끝까지 걷는다. 종이학 모양의 극장이 생겼다. 화장실이 깨끗해졌다. 수퍼가 보이길래 불쑥 들어갔다.

혹시, 소주 플라스틱 병에 든 거 있어요? 없어요. 다 이홉들이지 뭐.

물어봤던게 무안해져서 얼른 캔커피 한 개를 들고 나온다. 돌아나오는 길에 있는 다른 수퍼도 마찬가지다. 이홉들이만 판다.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플라스틱 병에 든 것은 없고 팩소주가 있다. 병이 더 낫긴 한데, 팩소주라도 집어든다. 병나발 불 수는 없으니까. 두 세 모금 마시면서 기분만 내고, 나머지는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천 백원입니다. 이 소세지는요? 오백원입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의 손이 거칠다. 도시 한켠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섬유질의 식물성 몸매의 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손으로 하는 노동에 익숙해 졌을 그런 마디가 굵고 큰 손.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했으나 귀찮아져서 그냥 벤치에 주저앉았다. 팩소주. 꼭 주스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 약해졌다. 21도라고 했던가. 이제는 사카린 냄새 때문에 캬! 하는 소리를 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저 약하고 달콤한 술이다.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건 가장 적은 돈으로 따듯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세지를 꺼내서 뜯고 안주 삼아 먹고 있는데 아까 흰둥이라고 불리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던 개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소세지는 양이 좀 적은 것 같아서 가방에서 야채빵을 꺼내 반을 뚝 떼어 잘라줬더니 냄새만 맡고 먹질 않는다. 휙 던졌는데도 가까이 가더니 코만 대보고 만다. 짜식. 빵이 싫으냐? 소세지를 한조각 잘라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이로 살짝 집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먹는다. 비린내 나는 게 좋다 이거지? 그러고는 또 한참 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저 애절한 눈빛이라니. 알았어 알았어. 한조각 더 잘라 주었다. 소세지를 다 먹고 나서 빵조각이 너무 커서 그런가 싶어 작게 잘라 주었는데 입만 대보고 만다. 그래. 나도 빵이 싫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내가 소세지를 더이상 주지 않자 원래 던졌던 반쪽짜리 빵을 앞발로 툭툭 쳐 보더니 가버렸다. 뭐야. 고양이도 아닌 것이. 마치, 이게 나 먹으라고 주는 거냐.. 하는 듯 보였다.

조금씩 소주를 마셨다. 날이 꽤 추운지 청바지 밑으로 맨살인 허벅지가 얼얼하다.

남은 빵을 먹었다. 또 소주를 마셨다. 바닷가에 있다고 문자 메세지를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신포시장에서 먹을 꺼리좀 사 올 껄 그랬나. 그러면 인천 역에 가서 바로 차 타면 되는 건데.

오른쪽 벤치에도 혼자 온 여자가 있었는데 가고 없다. 그 사람은 왜 혼자 온 걸까.

바로 옆쪽의 나이 든 바퀴벌레도 사라져 버렸다.

버스를 타고 신포시장에 갔다. 뒷편은 더 번화가인듯 싶었다. 신포시장은 아무리 봐도 정비를 잘 해놨다. 현대적인 간판에 러시아어까지 있는 표기. 닭집에 한국어로는 닭, 그 밑에 닭을 뜻하는 단어 대신 러시아어로 '맥주' 라고 적어 놓은 게 흠이지만. 말해줘야 하나? 언제 한번 그 집에 가서 술 마시면서 얘기해 줘야겠다.

산동반점에서 공갈빵을 샀다. 하나에 800원씩이나 한다. 전엔 천원에 세 개 였는데. 팥빵도 하나 사고, 닭강정집에 줄을 서서 닭강정 대자를 하나 샀다. 바로 한 거라 바로 먹으면 맛있을텐데. 가져가도 바로 먹을 사람은 없을 듯.

만두도 이천원어치 샀다. 김말이가 보이길래 하나 먹었는데 안 튀긴거라고 괜찮다고 하면서 돈을 안 받았다. 왼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돈을 지불하니, 아줌마가 월급날인가 보네요. 하긴 월급 탈 날짜 됐지. 라고 한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 오늘이 간조라서, 라고 말하고는 셈을 치뤘다.

술 마신 김에 오뎅도 한꼬치 먹고, 그 집에서 호떡도 샀다. 사람들이 일찍 들어와야 할 텐데. 너무 많이 사는 것 같았지만, 내일 올 손님도 있고 해서 그냥.

원래대로라면 동인천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탔겠지만 오늘은 왠지 인천역에 가서 타고 싶었다. 인천역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차이나타운 입구를 알리는 패루는 밤에도 조명을 받아 휘황찬란하고, 안쪽 길에도 가로등을 설치하고 경사를 완만하게 돋웠는지 볼만했다.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잔 뽑아 마셨다. 멀리, 대한제분의 북극곰 상표가 보였다. 차에 타고 집으로 오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인천에서 창동은 거의 끝에서 끝이라 돌아가는 길엔 세번째 자리 쯤에 앉아서 유리창 경계에 머리를 기대고 자면서 가곤 했었다.

이제 그곳에 나의 집은 없다. 나는 터덜터덜 역곡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왔다.


                                                   200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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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빠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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