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극

습작 2018. 5. 12. 20:00



정모에 갔다가 학교 선배를 만났다.

우습게도, 정모에 나온 네 사람 중 둘씩 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나머지 둘이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서 학교를 거슬러 올라갈 때 난 그저 옆에서 웃고만 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어느 고등학교 나오셨어요? 라고 물었던 내 앞자리 있던 사람이 내 선배라니. 알고보니 사는 동네도 비슷했다. 아니, 살았던 동네.

온라인에서의 만남은 가볍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이 어린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까 그렇겠지. 같이 만나서 놀고. 마음이 맞으면 사귀고. .

장소를 옮겨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 지네요, 라는 나의 말 때문에. 곱창집은 문 닫았을 것 같고, 감자탕이나 삼겹살이 좋겠어.

. 삼겹살집 가죠 뭐. 국물이 먹고 싶기는 했지만 감자탕의 뻘겋고 매운 국물은 싫었다. 동네의 전형적인 그런 고깃집.

안녕하세요. 아아 형부. 저 왔어요.

소주 한병 달라는 옆 테이블의 말에 갑자기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냉장고에서 소주를 갖다가 준다. 내가 아무래도 사람 많이 대하는 직업이라, 친해지면 언니, 형부 그러거든. 아무래도 빨리 친해지지.

창고가 생각났다. 창고에서의 나도, 아니 장소가 너무 좁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옆 테이블에 맥주를 갖다줘야 했을 때 벌떡 일어나 받아서 넘겨 주지 않았던가.

곱게곱게 크다가 인하대 수학과를 나와서 어쩌다가 식당을 한다는 주인 언니와 얘기를 몇 마디 나누다가 한잔 하자는 말에 언니가 그런다. 난 소주 안 마셔.

돼지수퍼에 가서 가시오가피를 사왔다. 이거 아닌데. 이거 가짜야. 950원짜리.

에이. 그래도 마셔요. 이것도 가시오가피는 가시오가피네.

술을 마시다가, 잠깐 졸았다. 가게 뒷방에 가서 눈을 붙이고 나왔다. 방 한켠에는 분홍색 내복을 입은 꼬마가 곤히 자고 있었다. 오래 전, 인천 고모네 식당에 가면 그랬었지. 온돌방의 식탁을 한 켠으로 붙이고 나란히 나란히. 사촌오빠와 사촌 동생과 나.

이제 좀 깼냐고 누군가가 나를 부르러 왔다. 밖에 나가서 술을 더 마셨다. 선배는 많이 취한 모양이다.

그 나쁜새끼..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중학교 2학년때부터 집에서 돈 한푼 안 받고 모은 돈이야. 알아? 그래서 산 집이야. 한푼 도움 안 받고 내 힘으로.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엉엉.. 나쁜 새끼. 더러운 새끼.. 으흑흑.

옆에 있는 내가 다 눈물이 났다.

그 새끼.. 사실은 새끼가 아니라 선배의 옛 애인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취직해서 월급타도 생활비에 보태는 게 아니라 비싼 옷부터 사고, 용돈은 선배에게 타서 쓰던.

선배는 용케도 이름이나 '그년' 같은, 성별을 알 수 있게 하는 호칭을 피해가고 있었다. 술집 바닥에 주저 앉아서 엉엉 통곡을 하는 그 상황에서도. 아직, 이성은 살아있었다. 이름을 말하는 순간 혹은 성별을 알 수 있게 말하는 순간 선배가 가족같이 생각하는 이 공간 안에서의 인간관계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쟤가 오죽하면 나한테 와서 그러겠냐. 얼마나 속상하면 그러겠냐고. 그래도 나는 다 이해한다. 그래도 나는 쟤가 이뻐. 혼자서 살라고 애쓰는 게 얼마나 이쁘냐.

 

형부라 불리는 사내. 눈썹이 짙고 눈이 크다. 쌍거풀도 짙다. 무슨 얘기를 했던가.. 폭력사태. 옆에 있다가 그냥 휘말리기도 쉽고, 재수 없어서 맞고 있다가 휙 밀었는데 뒤로 넘어져 죽어버리기도 한다는. 나도 그런 케이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3범이여. 재수없게시리. 어때요. 돈 없어서 합의 못 해준건데.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우리는 재혼이야. 같이 산 지 칠년쯤 됐지. 신고는 안 했지만.

저거, 내 딸내미, 피는 안 섞였지만 나를 닮았어. 눈이 크다래가지고 쌍가풀 지고 반짝반짝 해. 나한테 와가지고 아빠 아빠 하면, 아주 고거 이뻐 죽겠다니깐.

잠깐,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 스쳤다. 아버지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웃음.

명절에? 아니. 아무데도 안 가. 여기 있을 거 같은데.

그래. 와서 같이 놀자. 명절이 별거냐. 가족이 별거냐. 너도 갈 데 없으면 와서 같이 지내자. 밥도 같이 먹고. 술도 한잔 하고.

나중에라도, . 오천원짜리 찌개라도 하나 해 주지 뭐. 자주 놀러와.

 

한눈에 보기에도 별 기술도 없어 보이는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들어오더니 저쪽 테이블에 스윽 앉았다.

요즘 뭐하냐.

죽겠어요. 휴우.

그러게 바람은 왜 펴?

, 너 나가. 너만 보면 니 와이프 생각이 나서 억장이 무너진다. 딴데 가서 마셔!

느물느물한 사내는 그러나 결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형부라 불리는 눈이 커다란 사내가 눈을 더 크게 뜨고 남색 잠바를 입은 사내를 위로하기 시작한다.

바람을 폈는데.. 아후.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뭐 그러냐...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재수없게 여자가 ..

어느 순간, 선배 눈에서 불꽃이 번쩍, 한다.

야이 십새끼야. 바람피운게 자랑이냐. 미친새끼. 여자가 뭐 물건이냐..

나와 언니가 말리는 사이에도 순식간에 선배는 그 자식의 뺨을 때렸다. 술을 마셔서 정신없는 상태라서 그렇지, 체대 출신인 선배가 제정신으로 화가 나서 쳤으면 한방에 나가떨어졌을텐데. 그냥 가볍게 툭, 소리가 났을 뿐인데 남색 잠바는 과도하게 화를 낸다. 남자가 뭐 저래.

얼굴이 벌개져서 온갖 욕을 다 한다. 무슨 년 무슨 년.. 시리즈로 엮는다. 형부와 내가 양쪽을 수습해서 의자에 앉힌다.

죄송합니다. 좀 취해서요. 안좋은 일도 있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남색 잠바는 아직도 분이 덜 풀렸나보다. 자꾸 일어나려고 하길래 가서, 안경을 벗었다.

차라리, 저를 치세요.

고개를 꾸벅, 하더니 수그러 든다.

안경을 쓰고 제자리로 온다.

그러게 당신이 왜 쟤 편만 들어줘?! , 언니가 형부한테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내가 뭐 편을 들어줬다고 그래, 당신은? 변명을 해 보지만, 맞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과도하게 편들어 줬다. 같은 남자라 이건가.

당신 **가서 며칠 없을 때 야가 와서 주방 봐줬어. 고마운 사람 챙기는 건데 왜 그랴?!

. 나가자. 여기 있어봤자 싸움밖에 안 하겠다. 언니가 한잔 살께.

집 뒤의 여관골목을 돌아가니 아직도 불이 환한 해장국집이 있었다. 콩나물국밥 두 개와 소주를 하나 시켰다. 닭발7000, 꼼장어 8000.

국밥은 미원 냄새가 많이 났다. 먹으면서도, 내일 속 뒤집어 지겠군. 하는 생각이 든다. 건너편에는 머리가 긴 여자와 반곱슬의,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앉아서 술을 마신다. 여자는 발음이 불분명하다. 아마, 많이 취했거나 아니면 중국교포일 것이다. 억양이 좀 어색하다.

그 자식 진짜. 오지 말라니까 꼭 와가지고 그렇게 나가지도 않고 있는다니까. 재수없는 새끼. 와이프가 지난번에 와서 얼마나 난리치고 갔는지 알아? 그새끼만 보면 와이프 생각이 나서 난 진짜 안 받고 싶은데 자꾸 옆에서 감싸주니까 열받네. 아휴.

앞자리에 나와 마주앉게 앉은 남자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더니 전화를 건다.

. 형님. 저에요. 무슨 일 있었어요? 가게에서 싸웠다고 하는 거 같아서. ... 알았어요. 나중에 한번 갈께요.

좁은 바닥인지, 저 남자도 형부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 바람에 뒤를 돌아봤던 여자가 이쪽을 건너다 보며 아는 척을 한다.

언니.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 왠일이세요. 왠일은요. 술마시러 왔죠.

나이를 얘기하는데 그 여자, 자기는 서른 셋이라고 한다. ? 그럼 74?

에이, 언니 마흔 넘었구만. 왜 거짓말 해.

선배가 윽박지르자, 그 여자, 다시 뒤로 돌아앉는다.

저기요, 언니. 죄송해요. 이 언니가 많이 취해서요.

내가 변명을 하는데 옆에 앉은 식당 언니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국밥을 꾸역꾸역 다 먹는다.

몇술 뜨다가 숟가락을 놓은 선배에게 언니는 다 먹으라고 한다. . 이 언니가 사는데 안 먹냐? 콩나물이라도 다 건져 먹어. 끼니 밥은 걸러도 술밥은 걸르면 안되는거야. 밥 더 말까? 아이 이뻐라. 나는 니가 이쁘다. 나한테 와서 꼬장 부려도 나는 니가 참 이쁘다. 그래. 옳지. 한 술 더 말까? , 이거 다 먹어야 해.

식당 언니는 국밥을 선배쪽으로 밀어 주었다. 뭐가 묻었는지, 냅킨을 뽑아 내 입을 닦아준다. 가슴이 서늘해 진다. 나도 이런 언니 하나 있었으면.

니도 좀 꾸며. 어떻게 서른 하나짜리가 서른 여섯짜리보다 더 삭았냐.

선배가 워낙 동안이니까 그렇죠!

아냐. 얼굴 말고!

살은 살이라 치고, 좀 꾸며! 사람 취향이 얼마나 다양한지 아냐?!

알았어요... 공부 끝나면..

공부끝나면이 아니라, 지금부터 조금 꾸며봐. 꾸미면 이쁘잖아. 니도 못난 얼굴은 아니다. 지금 이 상태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꾸며봐라 이거야. 알았지?

.

나가서 오가피를 한 병 더 사왔다. 돼지수퍼는 아직도 문을 닫지 않고 있다.

이게 진짜야. 알았지? 세로로 가시오가피, 이렇게 빨간 글씨로 써 있는거.

뚜껑에 임꺽정 그림 있는 거요?

그렇지.

다시 술 몇잔이 오갔다. 선배는 아무래도 많이 취한 모양이다.

저 쪽으로 가면 나와. 수고 좀 해라. 멀리 안나간다.

.

걸음은 비틀대면서도, 발음은 멀쩡하다.

저 개새끼. 말끝마다 여자가 여자가. 무슨 여자한테 원한이 맺혔나. 지가 바람폈으면 바람폈지, 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고 지랄이야 지랄이!

맞아요. 아까 한대 치는데, 겉으로는 말리긴 했지만 솔직히 속이 다 시원하더라구요.

. 미안하다 초면에.. 내가 좀 많이 취했다. 자꾸 생각이 나서 그런다.

괜찮습니다.

담배좀 한 갑 사라.

.

편의점앞 의자에 선배를 앉혀놓고 담배 한갑을 샀다. 구석에 앉아있던 점원이 벌떡 일어난다. 2500원입니다.

한쪽 팔을 부축하고, 걷는다. 이 시간에 걷는 건 오랜만이다. 여섯시나 되었을라나. 아직 사위는 어두운데 성질 급한 사람들 집에는 벌써 불빛이 흘러나오고 티브이 소리가 들린다.

강아지 좋아하냐?

.

집에 도착하니 주먹만한 개가 펄쩍펄쩍 뛰며 반긴다. 삼개월짜리. 정말 작은 개. 바닥에 앉으니 허벅지 위로 냉큼 뛰어올라 꼬리를 마구 흔든다.

. 선배가 개를 후려갈겼다. 가만히 좀 있어, 로또!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 쪼끄만 애를.

아냐. 버릇을 들여야지.

 

화장실을 다녀오니 선배는 맥주를 따서 앞에 놓고, 전화기를 놓고 그렇게 앉아있다.

전화 하면 안되는 거겠지? 그러면 안되겠지?

그럼요. 전화하지 마세요. 받기나 하겠어요, 이 시간에?

그냥 잊으세요. 확 끊어버리세요. 사랑이라는게 그래요. 같이 있을때는 끝까지 갈 것 같지만, 일단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

그래? 넌 그게 잘 되냐? 난 잘 안되더라.

예전에 온라인에서 바람기 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20퍼센트 나왔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애인이 있을때는 정말 잘 하는데 헤어지면 더 이상 미련 두지 않는다 이거죠. 사랑했지만, 헤어졌으니까 이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좀 차가운 성격이죠.

이야. 좋겠다. 진짜 부럽다. 나는 그게 잘 안돼. 진짜 전화하면 안될까? 내가 전화하면 안되는거겠지?

. 자꾸 마음만 약해져요. 전화하지 마세요. 잊어버리세요.

 

작은 방에서 빨래 건조대를 꺼냈다.

그래. 여기서 자라. 이불이랑 위에 있으니까 편하게 자라.

선배는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인터넷을 조금 하다가 작은 방으로 들어와 잠이 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눈이 부셔서 잠이 깼다. 아래 깔려있는 옥돌장판의 스위치를 올려놓고 자서인지 온 몸이 땀에 젖어있다. 개운하다. 선배는 내가 노크를 해도 일어나지 않는다. 문을 여니 강아지가 펄쩍펄쩍 뛰며 반긴다.

우유를 한잔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한다. 한 두 시간 후면 선배도 일어나겠지.

다시 일어나니 두 시. 아직도 기척이 없다. 일어나서 뭔가를 읽으면서 기다리려 해도 도무지 책이나 신문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쓰린 속에 뭔가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아서 부엌을 뒤진다. 컵라면을 꺼냈다. 컵에 물을 담아 전자렌지에 돌린 다음에 스프를 넣고 물을 붓는다. 물이 덜 뜨겁다. 일분 더 해야 하나? 컵에 반쯤 물을 넣고 이분을 돌린다. 조금 뜨거워 진 것 같다.

아무래도 집에 가야 할 것 같다.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살금살금,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문을 여니 알람이 울린다. 이런. 한편으로는 알람 소리에 선배가 벌떡 일어나주길 바랬으나 강아지만 달려온다. 뚜껑을 열고 건전지 하나를 뺀다. 조심조심 바닥에 내려 놓는다. 현관문을 닫으며 강아지가 달려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강아지는 건전지를 물어뜯느라 정신이 없다.

잠바 오른쪽 팔이 이상하다. 두꺼워진거 같다. 손을 넣어보니 목도리가 잡힌다. 식탁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어 두었다가 집어들었더니 먼저 있던 목도리가 딸려 나왔나 보다. 이런.

화창한 날이다. 햇볕을 좋은데 바람이 무척 많이 분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둔 소주병 때문에 자꾸 오른쪽으로 처진다.

바람 때문에 가게 앞에 깃발로 장식해 놓은 것들이 빠른 속도로 펄럭거린다.

사람들은 옷깃을 단단히 여며 잡고 걸어간다.

집에는 누가 있을까.

차 한잔 생각이 간절하여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20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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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빠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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